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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와 복음성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들어가며]
60년대에 내가 처음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가는 나에겐 처음부터 끝까지 생소한 음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30년의 나의 삶에서 찬송가를 들어볼 기회도 없었고, 철저하게 유교가정에서 자란 나로선 찬송가가 어색하고 생소하고 잘 모르는 노래이기에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가를 따라 부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10여 년간의 신앙생활에서 어느 순간부터 찬송가의 가사에서 곡조에서 은혜를 받게 되었다. 아마 처음 신앙생활을 하게 된 새 신자는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80년대에 들어서서 부흥회 때나 기도원에서 처음으로 복음성가(福音聖歌)라는 새로운 교회음악을 접하면서 은혜롭고 신나는 찬양을 하게 되었다. 젊은이나 노년이나 할 것 없이 복음성가에 매료되어 신나게 불렀다. 그때 부르던 복음성가는 “내게 강 같은 평화…….” “예수님 찬양…….” “예수이름으로…….” 별로 많은 곡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성가의 곡수는 수백곡이 넘고(어쩌면 찬송가 곡수보다 많을 것이다.) 그중에는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은혜로운 복음성가도 있고 신나는 곡도 있지만,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노래가 많아 우리 같은 7080세대는 따라 부르기가 힘든 복음성가가 많다. 어느 교회나 주일 낮 예배를 제외하고 모든 예배에 찬송가는 부르지 않고, 복음성가를 부른다. 어느새 찬송가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복음성가가 주류 가되었다. 지금은 내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찬송가가 생소하듯 교회 나오면 생소한 복음성가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구경꾼이 되었다. 우리교회가 청년중심으로 대회를 연 복음성가 경연대회가 25주년이 되었는데 해마다 새로운 복음성가를 부른다. 청년들이 춤을 곁들인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을 보면 한편 부럽기도 하지만, 늙은이를 위한 복음성가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 교회안의 이방인(異邦人) 같은 소외감(疏外感)이 든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나와 같은 세대의 동년배들은 같은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어떻게 이해할것인가? 혼자 고민 하다가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아래와 같이 몇 자 글을 적어본다.
[찬송가(讚頌歌)와 복음성가(福音聖歌)의 차이]
교회 내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일반 노래와 구분하여 교회음악, 종교음악, 혹은 성가라 부른다. 성가는 사용 목적에 따라, 예배에 사용하는 예배음악과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음악으로 구분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예배음악을 찬송가로, 선교음악을 복음성가로 구분하여 부르고 예배음악을 또 다시 찬송가와 복음찬송가로 구분하기도 한다. 먼저 '찬송가'는 반드시 노래를 받으시는 대상이 하나님이어야 한다. 대개는 후렴 없이 불리며 아멘 코드를 붙이고 찬송가 100장 이전에 많이 위치하고 있다. '복음찬송가'(복음성가)는 찬송을 받으시는 대상이 반드시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직접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구원의 역사와 수단과 방법, 십자가의 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며 아멘 코드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복음성가'는 찬송가나 복음찬송가처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上向)의 노래가 아니라 옆으로 전하는 측향(側向)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복음성가는 대상이 인간들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간증하는 노래이거나 또는 성도(聖徒)들과 불신자(不信者)들에게 교훈, 권면, 위로를 담아 전하는 것으로, 부흥집회나 전도용으로 사용하며 아멘 코드를 붙이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집에는 이 세 가지가 혼합 구성되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구분 없이 사용하는데, 이 분류의 차이는 기도와 설교와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찬송가(Hymns) : 찬송을 받는 대상이 하나님이거나 그 삼위 중 일위라고 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관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노래이다. 대개의 경우 후렴 없이 불러지며 아멘 코드를 꼭 붙이고 찬송가의 앞부분(100장 이내)에 편집돼 있다.
*복음찬송가(Gospel Hymns) : 하나님을 찬송하되 직접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섭리 구원의 역사 수단과 방법, 십자가 하나님의 창조 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며 아멘 코드는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찬송가 보다는 복음성가 쪽에 더 가깝다).
*복음성가(Gospel Song) :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그의 간증을 노래하거나 성도들 또는 불신자에게 교훈이나 권면 그리고 위로 등을 담아 쉽게 전하는 노래이며 부흥집회나 전도용으로 사용하며 아멘 코드를 붙이지 않는다. 위의 찬송가나 복음찬송가처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의 노래가 아니라 옆으로 전해지는 경향의 성격을 띠고 있다.
*C. C. 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 현대 대중음악 풍의 연주(Contemporary)에 하나님 혹은 예수님, 성경, 복음 등에 대한 찬양의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음악을 통칭하는 말이다.
[복음성가라는 명칭은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대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창작되어진 곡들을 복음성가(Gospel Song)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한다. 그 대표적인 작사, 작곡가는 화니 크로스비 (F.J.Crosby), 쌩키(Ird. D.Sankey), 블리스(Bliss), 스웨니(Joh.R.Sweney)…….등등이라 고한다.
우리나라 찬송가에서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갈보리산 위에(135장), 할렐루야 우리 예수(159),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163), 나의 죄를 씻기는 (184), 하나님의 진리등대 (276), 내 주의 보혈은 (186), 너희 죄 흉악하나 (187),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202),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204)…….”등등 수많은 곡이 수록되어있다.
처음 복음성가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은 미국에서 복음적인 대중 집회가 연일 계속 되어지는 가운데 주로 그런 집회 자리에서 많이 불려 졌고 어떤 곡의 경우는 아예 그런 집회를 위해 작사. 작곡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스펠(Gospel Song)은 현대에 들어와서 미국에 노예제도가 있었을 당시에 흑인들이 부르던 찬양이라고 한다. 찬양이라기보다도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노동요' 같은 노래였다. 힘든 노예생활을 하다 보니 밖으로 표출 할 수 있는 방법이란 거의 없었다. 이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구원의 하나님을 접하게 되었고 백인들이 부르는 노래를 흉내 내서 간단한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블루스이며 그것이 발전된 형태의 장르가 가스펠 이라고 한다. 가스펠은 우리가 복음성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7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찬양의 붐을 타고 우리 교계에는 미국에서 단순한 팝송의 가치밖에 없는 곡들까지도 복음성가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도입되었는가 하면 거기에 모방 창작의 붐까지 일어나 예수 믿는 사람이 만들어서 부르는 노래는 모두다 복음성가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인식이 형성되어 버린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진정한 복음성가라는 의미는 ‘복음적이요, 성스러운 노래’라는 뜻인데 어떻게 대중들의 취향에 따라 만들어진 곡을 복음성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교회에서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예배의 차등화를 만드는 요인이 된 면도 있다. 새벽기도회 때나 주일 낮 예배 시간에는 찬송가에 실린 곡만을 불러야 하고, 주일 저녁이나 수요일, 금요철야 예배 아니면 부흥회 때에는 거의 다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이 관례화되어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닐 수가 없다. 예배는 다 똑같은데 주일 낮 예배는 거룩한 찬송가를 부르고 다른 예배는 거룩하지 않은 복음성가(?)를 부른다면 이는 모순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주일 낮 예배에 합당치 않은 곡이라면 저녁예배나 부흥회, 수요예배, 금요철야 예배, 수련회 예배에서도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주일 낮 예배의 목적과 철야예배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찬양의 선곡을 다르게 하는 의도도 있다고 본다.
위대한 찬송가에는 오래전에 오직 그 찬송가를 남기고 이 땅을 떠난 고결한 성도의 순수하고 헌신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본다. 이런 찬송가를 부르거나 그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위대한 신앙인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에 동참하는 일이다. 건전한 찬송가는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계시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보고 기뻐한다. 찬송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혼이 계시된 진리 또는 성취된 사실을 보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본다. 하나님은 큰일을 행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노래하는 것이다. 복음성가도 작사 작곡자의 위대한 신앙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찬송가와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의 찬송이 되어야한다고 본다. 그러려면 찬양 인도자가 복음성가의 선별을 잘하여야한다고 본다. 일부계층이 좋아하는 복음성가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좋아하고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가 선별되어 불렀으면 좋겠다.
[찬송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통일 찬송가의 표지를 보면 ‘찬송가’ 라고 인쇄가 되어 있다. 그런데 표지에 인쇄된 ‘찬송가’는 정확히 말하면 ‘통일 찬송가’ 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기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1893년에 ‘찬양가’가 처음으로 나왔다. 그 후 각 교단별로 찬송가가 출판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교단마다 따로 사용하던 ‘신정찬송가’, ‘신편찬송가’ 그리고 ‘부흥성가’를 하나로 묶어 1949년에 ‘합동찬송가’를 발행하여 모든 교파들이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1962년에 다시 ‘새 찬송가’가 나왔고 또 1967년에는 합동 찬송가를 개편한 ‘개편찬송가’가 출판되었다. 이 후에 다시 찬송가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1981년에는 찬송가 공회가 발족하게 되었고 1983년에 한국교회 백주년을 맞이하면서 ‘통일 찬송가’를 발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새롭게 만들어진 통일 찬송가에는 과거의 합동 찬송가, 새 찬송가, 개편 찬송가에 수록되지 않은 채 복음성가로 분류되었던 곡들이 40여곡이나 수록되기도 했다.
통일 찬송가의 탄생 유래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거룩한 주일예배에서는 복음성가를 삼가고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 교회 내에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상당히 많이 있다. 이 주장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만약에 이 주장이 주일예배에서는 주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내용의 노래들만을 불러야 한다고 이해하는 측면에서는 아주 타당한 주장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주님을 높여드리며 모든 가치를 주님께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장이 지금 한국 교회가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1983년도에 재편집된 ‘통일 찬송가’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이다. 왜냐하면 통일 찬송가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주님을 높이는 노래들을 모두 담아 놓은 유일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거룩성과 유일성을 통일 찬송가에 똑같이 부여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통일 찬송가 안에는 주님을 직접 높여드리는 노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노래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통일 찬송가 안에는 주님을 직접 높이는 노래들보다는 기도의 내용이나 성도나 불신자들을 향한 권면과 복음 전도의 내용과 같은 시에 곡조를 붙인 곡들이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예배 시 통일 찬송가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즈음에 불려지는 복음성가들보다는 통일찬송가의 곡들이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통일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도 그 곡들이 쓰여 질 시대에는 당시 최신 유행 음악 스타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곡이 쓰여 진 시대나 곡의 형식, 악기의 종류에 따라 거룩한 음악과 거룩하지 못한 음악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통일 찬송가에는 19세기의 곡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그 곡들은 영국이나 미국에서 부흥집회에서 복음 전도를 위해서 쓰여 진 곡들이 대부분이다. 그 외에도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통일 찬송가에는 외국 국가의 곡조에 해당하는 노래들(67장, 77장, 245장)도 있고, 일반 오케스트라 심포니 협주곡이나 오페라 같은 일반 클래식에서 멜로디를 가져온 곡들(13장, 17장, 69장, 94장, 207장, 371장)도 있고 여러 나라의 민요나 대중가요(39장, 57장, 88장, 106장, 141장, 160장, 173장, 290장, 314장, 405장, 430장, 454장, 459장, 519장, 533장, 545장, 547장)에 복음적인 가사를 써넣은 노래도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큰 오류 중 또 한 가지는 통일 찬송가에 들어 있지 않은 노래들을 가리켜서 모두 복음성가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통일 찬송가를 조사해 보니 제일 오래된 찬송가는 103장으로서 A.D 3세기 때 알렉산드리아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가 쓴 찬송 시 이다. 그리고 외국 곡 중에서 가장 최근의 곡은 491장(C.H Greene)으로 1951년에 만들어진 곡이며 한국 곡 중에서는 92장, 272장으로서 1983년에 만들어진 곡이다. 그렇게 볼 때 1983년 이 후에 작곡된 곡들은 모두 복음성가라고 분류되는 것인데 이것은 자칫하면 1983년 이후의 곡들 중에는 찬송가 즉,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찬송가'는 '주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노래'를 뜻하는 일반명사(一般名辭)이며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라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는 '통일 찬송가'라는 고유명사(固有名詞)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교회 내에서 불려 질 수 있는 주님을 직접 높이는 찬송곡과 한국교회 부흥 초기의 부흥성가들 그리고 성도나 불신자들에게 권면하거나 주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인 '복음성가'들을 모아 1983년에 다시 편집한 찬양 곡 집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혼란 중에 나온 단어가 C.C.M이다. C.C.M은 Christian Contemporary Music의 줄인 말로서 현 시대의 크리스천들에 의해 불려지는 모든 노래들을 총칭하며 특히 클래식 음악 양식보다는 대중음악 양식의 노래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통일 찬송가에도 주님을 직접 높이는 노래와 고백 기도의 노래들이나 성도들 및 불신자들에게 전하는 복음성가가 있듯이 C.C.M에도 주님을 높이는 노래들도 있고 복음적인 노래도 있는 것이다. 오직 통일 찬송가만이 주님을 높이는 노래들을 수록해 놓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선진국의 교회들과는 달리 한국 교회의 주일 예배에만 있는 이상한 특징이 한 가지가 있다. 주일 예배 순서지에 명시되는 회중찬양 시간에는 오직 하나의 찬양집인 '통일 찬송가'의 곡들만 선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일예배에서 주님을 더욱 풍성히 높이는 것을 제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우리가 예배 시 사용하는 통일찬송가의 거의 대부분이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부흥집회에서 사용되던 당시의 유행하던 음악 스타일로 쓰여 진 복음성가로 분류될 수 있는 곡들이 대부분인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의 우리 한국교회의 주일예배에서 예배 순서지에 표시되는 회중 찬양시간에 통일 찬송가만을 고집해야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통일찬송가의 곡들은 다른 어느 교회시대에도 견줄만한 훌륭한 영성가(靈聖家)들과 하나님의 참된 증인들의 노래들이라는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 곡들은 한국 교회 탄생 이래 지금껏 수많은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며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한 곡들이라는 데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섭리와 성품으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높여드리며 그 분께 그러한 무한한 가치를 드리는 주일예배에서, 단지 통일찬송가로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제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풍성히 찬양할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찬송가와 복음성가에 대한 바른 이해]
계명대학교 ‘교회음악론’을 강의하는 이 영기 교수는 “찬송가는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로서 구원에 대한 감사나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간구 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된 가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주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라고 정의 하였고, 복음성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래로서 신앙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역사하심을 증거 하거나 성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낙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는 내용으로 된 가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복음성가는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나 신자들 간의 공통된 신앙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고 정의 하였다. “찬송가는 그 대상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수직적인 관계이고, 복음성가는 인간 대 인간이라는 수평적, 횡적인 관계이다.” “찬송가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복음성가는 사람들이 듣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가사내용이나 음악형식, 연주태도 등은 다르기 마련이다. 찬송가의 사용은 예배에 가장 적절하고 이를 연주하는 태도로 기도하는 자세와 같이 간절해야 하며, 하나님이 연주자 앞에서 그 찬송가를 듣고 계시는 것처럼 노래해야 한다. 복음성가는 부흥집회나 전도 집회, 또는 친목회, 간증의 모임 등에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음성가를 부르는 방법은 여러 악기를 동원하여 감동적으로 호소력 있게 하여 전도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정의 하였다.
또 현행 찬송가에 나타나는 문제점은 “찬송가로써 예배하는 많은 회중들이 이 책에 수록된 모든 곡들을 찬송가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현행 찬송가에는 그 내용의 구분에 의한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구분이 분명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아멘의 사용이나 선곡에 있어서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찬송가가 회중찬송가라는 점에서 찬송가 편집에서 고려해야할 또 다른 원칙은 수많은 회중찬송 곡 중 그 곡에 대한 가치 평가가 이미 되어 진 곡들을 선곡하여 엮는 문제이다. 고전(Classic)이라는 말로 표현 되는 이러한 곡들이 회중이 부른다는 점을 고려하여 선곡되고 편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시자(作詩者)와 작곡자(作曲者)의 신앙적인 생애도 고전의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회중찬송가의 창작은 작자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새로운 회중찬송가가 편집될 때에는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분명한 구분에 의하여 번역되고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회중찬송가를 창작하는 사람 또한 분명한 기준을 가짐으로써 찬송가는 찬송가답게 복음성가는 복음성가답게 써야 할 것이다. 회중찬송가는 회중의 노래이다. 회중의 노래는 예술 가곡이 아닌 민요와 같아서 적극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노래이며 같은 시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이해되며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좋은 회중찬송가는 한국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책에는 3.2%만이 우리의 손에 의하여 지어진 곡들이다. 나머지는 모두 외국의 것을 번역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노래 말의 번역은 용이하지 않으며 그 의미의 전달 또한 완전하지 못하다. 우리가 회중찬송가를 몇 번 불러도 큰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번역에서 오는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성가에 부정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복음성가 가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걱정되는 것이 있다. 이런 경우를 대부분 보면 예수님을 믿은 후 성경적인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물론 성경적인 지식이 적다고 작곡을 못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감동과 은혜로 몰입돼 가사를 만든 경우이다. 그럴 때 아차하면 성경적이 아닌 가사를 작사할 수 있기도 하다. 즉 성경적인 의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부를 때 작사자의 영감을 맛보려하므로 오는 커다란 실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성령에 관해 구약은 신약과 다르다. 구약에서는 성령님이 오셨다 떠나셨다 한다(예 삼손). 하지만 신약에서는 믿는 사람은 성령으로 구원의 날까지 인치 신다. 그런데 구약의 가사로 복음성가를 만든 것이 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가사가 있는 복음성가이다. 이것은 다윗이 그의 죄를 고백하는 시편 51편에 있는 것이다. 만약에 성경을 잘 모르는 분이 이런 찬송을 부르면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님이 내주하신데 떠나 갈수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 떠나지 말게 해 달라’고 불안해하며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어떤 복음성가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에 이런 찬송을 하나님께 했다고 합시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복음성가를 자신을 향해 부르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취로 빠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예배는 우리의 지(智), 정(情), 의(義)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내 놓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성가를 부를 수 없냐?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복음성가 참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그래서 찬송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것입니다. 복음성가를 계속 부르는 사람들이 찬송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관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찬송가라고 하면 케케묵은 것같이 생각하고 고리타분해서 한 물간 것 같이 여기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류된 것을 아는 분이라면 가사에 민감해 할 것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라면 바른 찬송을 더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찬송가도 하고 좋은 복음성가도 하면 될 것인데, 거의 복음성가를 하면서 찬송가를 낮게 보는 처사는 문제가 있다. 위에 예를 든 것같이 만약에 좋은 복음성가를 분별치 못한다면 신학자들이 분류해 놓은 찬송가를 찬송하는 것이 영적인 면으로는 훨씬 더 안전 할 것이다. 특히 인도자가 성경을 잘 모르면서 음악을 잘 아는 분이라면 이런 면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현대 교회의 한 가지 경향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시대가 계속되며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성경말씀보다 자기 귀에 즐겁고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므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는 말씀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보다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을 감정적으로 먼저 두려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을 높이며 경외하면 즐거움과 기쁨이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중심이 되고 그에 따라 순종하는 자가 순종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 대신 찬송으로 자신의 감정을 올리려고 하는 모습이 있는 것 같으므로 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찬송가든 복음성가든 성가(聖歌)는 바른 성가를 해야 합니다. 성가는 영적(靈的)인 것이므로 더욱 바른 성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신학적으로 분류된 찬송가를 낮게 보는 것은 성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가 아닌가 합니다. 또 성가로 자신의 영적인 삶을 이어 가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합니다. 말씀 안에 있으면서 주님 안에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의 빛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즉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한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결과가 시와 찬미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성도의 삶은 말씀에 중점을 두며 성가는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쓴 성가가 먼저여서는 안 됩니다. 먼저 말씀에 중점을 둘 때 찬송가나 복음성가에 대한 갈등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 영기 교수님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맺으며]
교회 부흥을 위해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는 것이 현대교회의 일반적인 풍조인 것 같다. 하지만, 복음성가를 선별하는데 신중을 기해 모든 성도가 즐겨 부를 수 있는 곡을 선곡(選曲)하여 불렀으면 좋겠다. 시대에 유행하는 새로운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도 좋지만 작사(作詞), 작곡자(作曲者)의 신앙적(信仰的) 배경(背景)을 잘 검토하고, 모든 성도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은혜로운 좋은 곡을 선별하여 불렀으면 좋겠다. 특히나 우리네와 같은 늙은이들을 배려하여 젊은이들의 취향(趣向)에 맞는 복음성가를 부를 때, 구경꾼 밖에 될 수 없음을 배려해주었으면 좋겠다. 모든 예배시간에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선곡(選曲) 해주었으면 좋겠다. 하나 더 배려해 준다면 복음성가도 찬송가처럼 부록으로 인쇄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공급해주면 더욱 좋겠다. 스크린에 뜨는 가사는 안구협응(眼口協應) 능력이 부족한 7080세대는 따라가기에 바쁘다. 물론 찬양을 인도하는 분들은 위와 같은 문제점을 모르는바 아니고 쉽지는 않은 줄 알지만, 발전적 측면에서 건의도 해보는 것이다.
인천주안감리교회 평생교육원장 송 석안 장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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